1. 군사놀이자금마련사건
1552년 장군께서 8세때 외가인 아산 뱀밭으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장군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군사놀이를 하는데 기운으로나 지혜로나 당할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대장이었다. 군사놀이를 하려면 칼을 만들고 활도 만들어야 하는데 자금이 없었다.
장군은 꾀를 내어 동네 다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아 내기로 꼬마들과 합의를 하였는데 마침 의관을 갖춘 점잖은 분이 다리를 건너려고 했다. 장군은 그분 앞을 막으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로부터 통행세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엽전 한 잎만 놓고 가십시요”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껄껄 웃으면서 “아니 이 다리는 여러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니도록 놓은 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통행세냐? 꼬마들 장난이 너무 지나치구나 ”하면서 그대로 건너려는 것을
장군은 큰 소리로 “옳은 말씀이오나 이 다리는 동네 어르신들이 놓으신 것인데 우리는 이 동네 꼬마들이므로 장차 이 동네의 일을 책임지고 해 나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장래의 주인입니다. 주인이 필요할 때 자기 물건을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일이 무엇이 틀렸나요? 세만 내고 가시면 됩니다.”하여 그 분은 할 수 없이 통행세를 내고 말았다.
2. 병조정랑(정5품) 徐益의 인사 청탁 거절사건
1579년 장군이 훈련원봉사(종8품)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병조정랑 서익이 장군의 부하인 친구를 정7품인 “參軍으로 올리려한다”면서 “거기에 맞도록 서류를 꾸며 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때 장군은 얼굴빛이 금세 굳어지면서 “정7품의 자리는 바로 그 밑의 종7품의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 이 나라의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나는 규정대로 일을 처리할 뿐이니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요”하며 거부하자 갖은 위협과 꼬임으로 장군을 설득하였으나 계속하여 거부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3. 병조판서 金貴榮의 庶女 소실맞지 거절사건
1579년 장군께서 역시 훈련원봉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장군의 사림 됨을 잘 알고 서녀를 첩으로 권하였는데 당시 대다수의 관리들이 京妻와 鄕妻를 두었고 더구나 이 경우는 출세가 보장되는 데도 이를 거절하였다.
4. 전라감사(종2품) 孫軾의 전법시험사건
1580. 7 장군께서 흥양(지금의 고흥) 발포 만호(종4품)로 부임하여 곧 바로 진지를 새롭게 정비하고 수군의 설비와 항로조사, 항해술의 개선, 작전기술의 연구 및 부족 시설의 설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장군을 미워하는 자들의 꾐에 빠진 전라감사 손식은 장군을 혼내려 마음먹고 예하 지방관들을 모이게 하고 능성감영(지금의 화순 능주)까지 오게 하여 여러 가지의 진을 치는 법을 묻고 그려보라고 명령하였는데
장군은 멈춤이 없이 능숙하고 세밀하게 답하자 감사이하 모두가 감탄하고 감사는 잘못을 뉘우치고 장군을 격려하였다.
5. 전라좌수사(정3품) 成鎛의 오동나무사건
역시 장군께서 흥양발포만호의 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객사앞 마당의 굵은 오동나무를 베려는 것을
“이 나무는 관의 나무이니 수사인들 어찌 私用으로 베어 갈 것인가” 하면서 베지 못하게 하고 “돌아 가서 수사에게 여쭈어라” 하여 수사로부터 미움을 샀다.
6. 후임 수사 이용의 군사점검사건
전임수사로부터 장군에 대한 아니꼬움을 인계 받은 전라좌수사 이용이 “죄 줄 것이 없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시에 각 포 (浦)를 점고 하였다.
5포의 군대를 모두 점고 한바 발포에는 결석자가 3명이고 다른 포에는 많은 결석자가 있었으나 발포만이 결석자가 있는 것으로 장군을 파면토록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다른 4 포의 결석한 명부의 초본을 손에 넣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게 된 좌수사는 할 수 없이 걸음이 빠른 자를 시켜 보고서를 되 가져왔다.
그 후(1581) 좌수사는 전라감사와 더불어 여러 수장들의 성적을 의논하면서 장군의 공을 맨 끝에 두었으나 전라도 도사인 조헌이 “도내에서 이순신이 제일인데 그게 무슨 짓이요”하여 무함을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7. 군기경차관 서익의 병기검사사건(1차 파면)
장군이 훈련원봉사로 있을 때 친구의 월천승진을 요구하여 거부당했던 전 병조정랑 서익이 장군에게 부임지의 상관들을 통한 보복을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는데
군기경차관이 되어 1582. 5 발포에 와서 각종검사를 하고 군선과 군기가 잘 되어 있고 훈련도 잘 되어 있음에도 “병기에 먼지가 끼었다” 며 트집 잡는 것을 장군은 전혀 꺼리지 않았으나 “병기의 관리가 엉망이므로 파면해야 됩니다”고 중앙에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8. 우의정 柳捵의 전통(箭筒)요구사건
장군께서 서익의 병기검사로 파면되었다가 4개월만에 복직하여 1583. 5 훈련원봉사로 좌천 복직되었는데 우의정 유전은 장군이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장군에게 “갖고 싶다”고 하였으나
장군은 “그 것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알면 대감과 소인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전통 한 개로 대감과 소인의 사이를 야릇하게 해석한다면 도리어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여 슬기롭게 거절하여 유전은 “옳은 말이 로고”하며 한층 더 높게 보았다.
9. 북병사(종2품) 金禹瑞의 공적묵살사건
1583. 10 장군께서 함경도 건원보의 권관(종9품)으로 발령 받았는데 여진족의 鬱只乃가 경계선을 침범하여 조정에서 크게 우려하였으나 장군은 그를 유인하여 없애버렸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크게 포상하려 하였으나 북병사 김우서는 “이순신은 상관에게 보고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하였다”고 하여 상을 주지 못 하게 하였다.
10. 북병사 이일의 장군처단미수사건(2차 파면, 첫 번 째 백의종군)
장군께서 1586. 1 함경도 조산보만호(종4품)로 발령 받고 1587. 1은 녹둔도 둔전 관을 겸하게 되었다.
장군은 녹둔도의 경비에 병력이 너무 적어서 어려움이 많아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증강을 수 차례 건의하였으나 거절만 당하였다.
녹둔도는 농사를 지어 군량으로 쓰는 곳으로 군사들이 섬을 지키면서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으므로 추수 때마다 식량이 부족한 여진족들의 기습이 우려되었다.
1587년 추수가 끝나갈 무렵 여진족인 沙送阿, 甲靑阿등의 많은 군사가 기습하여 크게 불리하였으나 선방 선전하여 왼쪽허벅지에 부상을 당하면서 격퇴하고 추격하여 포로까지 구했으나 책임을 저야 할 북병사는 장군을 아예 죽여버릴려고 영창에 가두고 형틀을 준비하여 심문을 시작하였는데
장군께서 전에 병력증강을 요청하면서 그때마다 보고서의 사본을 남겨놓고 당당한 답변을 하자 도리어 불리한 결과가 될 것을 알고 아군의 피해가 크고 장군의 잘 못인 것으로 보고하여 경흥부사 이경록과 같이 파면이 되고 백의종군을 시켰다. 그 후 장군께서는 큰공을 세우고 1588년 후반을 고향에서 쉬었다.
11. 정여립의 모반과 관련한 당당한 처신
1589. 12 정읍현감(종6품)때의 일이다. 정여립의 모반으로 조정에서 을축옥사가 벌어저 전라도도사 曺大中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가택수색을 당하였는데 장군의 편지가 발견되어 포교 중에 장군과 안면이 있는 자가 있어 장군께 “영감님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없애버림이 어떤가요?” 하자 장군은 “별로 뜻도 없는 글월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국가의 수검에 걸린 이상 없앨수야 있나”하고 거절하였다.
그 후 조대중이 친국 당하면서 매맞아죽어 그의 시체가 돌아 왔는데 관리들은 조정이 두려워 문상을 못 하였으나 장군께서 문상을 하면서 그의 가족을 보고 슬피 울어 다른 사람들이 존경에 맞이하였다.
12. 간첩 요시라의 활동(3차 파면, 두 번째 백의종군)
우리말을 잘 하는 대마도출신 요시라는 1593. 9부터 경상좌병사(종2품) 김응서에게 접근하였으며 강화조약의 진행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적은 장군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언제든지 패할 것이므로 없앨려고 간첩 요시라를 파견하여 원수부와 장군의 알력을 조장하였다.
1597. 1. 14 소서행장은 가등청정의 군대를 장승포에 은신시키고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어 “소서행장이 가등청정과 사이가 나빠서 가등청정을 죽이려고 하고 일본에 건너간 가등청정이 1. 21 돌아 올 것이니 장군을 보내어 우리가 표시한 배를 없애라‘고 하여 김응서는 이를 믿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꾐에 넘어간 권율은 한산도로 찾아 와서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장군은 도원수가 적의 간계에 빠진 것을 알고 이에 따르는 척만 하였다.
조정에서는 가등청정이 이미 조선에 돌아 왔음을 알고 크게 놀랐고 이에 경상좌병사 김응서의 장계와 서인, 북인들이 모함하여 장군은 세 번째의 파면이 되고 2. 26 서울로 압송되어 3. 4 투옥되었다가 3. 12 친국하면서 사형의 어명을 내렸는데
통정대부 정경달의 구명운동, 좌찬성(종2품) 김명원등의 동조, 전라좌수사 이억기, 관충추부사 정탁의 상소로 사형이 면제되고 4. 1 “도원수 권율 밑 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간첩요시라에게는 參議<정3품>의 직과 후한 상이 내려짐)
13. 명나라제독 陳麟의 설복
1598. 1 진영을 보화도에서 고금도로 옮기고 그해 7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한 소서행장의 군을 포위봉쇄 하였을 때의 일이다.
명군의 행패가 극심하여 주민들이 살기가 힘들었다. 장군은 명제독 진린이 장군이 옆에 있어 든든하고 떨어저 있기를 겁내고 있음을 알고
진린에게 “우리는 진영을 옮길테니 독단으로 작전을 수행하시오”하여 진린이 “왜 그러시는거요? 하면서 두려움을 보이자 상황을 설명하고 ”비록 명의 수군이라도 나의 절제를 받도록 하시오“하여 진린이 이에 따르겠다고 하여 주민에게 행패를 하지 않도록 하였고
1598. 8. 18 풍신수길이 죽자 적은 앞 다투어 퇴각하기에 바빴는데 소서행장이 연 3이간 진린에게 뇌물을 주면서 “퇴각 길을 열어 달라”고 하여 진린은 장군에게 길을 열어 주자고 거듭 사정을 하였으나 장군이 거절하자 칼을 꺼내 들고 “이 칼은 황제께서 마음대로 쓰라고 내어준 것인데 ”하면서 위협하는 것을
장군은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소. 그러나 도망치는 적을 살려 보낼 수는 없소”하고 태연스럽게 대하자 “장군의 말씀이 옳소. 내가 잠깐 잘 못 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오”하면서 장군에게 고분고분 하였다.
장군의 영정
¤ 이순신 장군에 대한 유명인들의 평가 ¤
명나라 진린도독
명나라 진린 도독은 선조에게 바치는 글에서 “그의 지략은 하늘에서 내렸고 용맹은 자룡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영국해군 발라드장군
영국해군 발라드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공적은 역대 해상 지휘관들 중에서 맨 앞줄에 서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본명장 도고 헤이하치로
러일전쟁 때 무적함대라던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 3대 명장 가운데 한명인 도고 헤이하치로는 “내 자신은 이순신에 비한다면 하사관만큼도 못 한다”며 1904년 진해만에서 출전할 때 이순신에게 진혼의 예를 올렸다.
일본 해군전략가 가와다 이사오
“임란당시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 지원을 했더라면 오늘날 일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보다 이순신의 위대함을 잊고 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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