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의사님의 영혼을 뵙고 위로 드립니다 ☆
저는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라'고 하면 훌륭한 분이
많지만 서슴없이 ‘이순신 장군님, 김구 선생님,
안중근의사님’이라고 대답합니다(출생순).
의사님! 의사님의 순국에 대하여 ‘한일합방은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합법으로 하였기 때문에 테러범’이라고
주장하는 숭일종속주의(崇日從屬主義者)는 대한민국에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의사님을 존경하고 기립니다. 의사님의 순국은 민족의 자존심과 긍지를 일깨웠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의사님께서 좌우명으로 주셨던 묵서는
민족정기를 함양하는 교훈이고 보물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의사님의 숭고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에 대한 존경으로
일제의 관리들이 몰래 의사님의 묵서를 받고 싶어 하였고
의사님을 사형장으로 호송하던 간수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 머리를 벽에 받아 피를 흘렸던 것과
당시의 교도소장 딸은 독신으로 살면서 의사님의 영정을 모시고 조석으로 예를 올리면서 사죄로 위로하고 있으며
어느 간수의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 의사님의
영정과 위패를 나란히 모시고 있는 등의 의사님을
숭모하는 사실들이 공개된바 있습니다.
늦게나마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부터 서울시가
의사님의 유품들을 보물로 지정하고 기념관 등의
시설을 짓고 다른 기관에서도 보물로 지정하는 등
유품의 공개를 하였으나 보지 못하신 많은 분들이
여기에서 보시는 장으로 마련하였습니다.
훌륭한 장수이시며 교육가이시고 서예가이셨던 의사님의 유품을 여러 분이 보시면서 의사님에 대한 깊은 인식과
새로운 정신무장이 되신다면 보람이겠습니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애태운다.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무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畧不改眞可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캄캄하니 뜻 있는 사나이
어찌 편히 잠들겠는가 평화시국 못 이룸이 아직도
북받치는데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만
일의 성패는 하늘의 뜻에 달렸다.
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서 요약하라.
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志士忍人殺身成仁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
澹泊明志寧靜致遠
욕심 없고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밝게 가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포부를 이룰 수 있다.
안중근의사의 영정, 위패와 벼루(다이린사주지 사이토 다이켄보관)
위-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리시에 있는 다이린사의
사이토 다이켄주님께서 의사님의 영정, 위패와
뤼순감옥의 담당간수로서 의사의 숭고한 이념과
고매한 인격에 감복하여 인격적인 처우를 하셨고
의사님께서 처형 당일 아침에 써주신 유묵
‘爲國獻身 軍人本分“을 간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매일 다이린사에 다니면서 의사의 명복을 비셨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의 영정, 위패를 나란히 모시고
있으며(유묵을 고이 간직한 유족들이 의사님의
탄생 100주년인 1979년 조국에 반환함)
아래-의사님께서 사용하시던 먹과 벼루뚜껑, 벼루.
벼루의 뒷면에 ‘경술년 3월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이라는
의미의 글씨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음.
유묵
안중근 의사님이 직접 쓰신 유묵 중 공개되지 않았던 3점이
일본의 시민단체가 주최한 전시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왼쪽부터 不仁者不可以久處約(어질지 않은 자는 오랫동안
거북한 제약을 견디지 못한다), 敏而好學不恥下問(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戒愼乎其所不睹(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바에 경계하고 삼간다).
1910. 3. 8 동생 정근, 공근과 프랑스신부 빌렘의 안의사님 면회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본관 순흥 아명 응칠(應七) 황해도 해주 출신.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셨으며 글쓰기, 말타기, 활소기에 능하셨고 특히 사격의 명수이셨습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신자가
되시고 신부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셨습니다.
1904년 평양에서 홀로 석탄장사를 하시다가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가게를 팔아 1906년 삼흥(三興)학교를 세우시고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시어 인재양성에 힘쓰시다가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시어 의병운동에 참가하셨습니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시어 일군과 격전을 벌리셨으나 실패하시고 노에프스키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으로 활약하시다가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시고 그 해 10월 조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시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시어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1909. 1. 26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시어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시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시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셨습니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감옥에 수감되셨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뛰어난 글씨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셨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셨습니다.
의사님의 가족에 대한 안위를 걱정하고 성공하여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선량한 사람들의 공통된 애정입니다.
아래는 의사님의 가족에 대한 글입니다. 꼭 보세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2&aid=0000060669&
http://blog.daum.net/donggook95/131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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