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애족에 헌신하신 분

이순신 장군의 일생

육사생 2008. 1. 27. 08:32

                      이 순 신  장 군 의  일

 

 

   왕조시대 대부분의 위인들은 왕과 위가 먼저였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국가가 먼저였다. 왕보다는 국민을 위하셨다.    

   국가공무원으로서 이보다도 더 바른 자세가 있겠는가.

장군의 일대기를 자주 읽기 위하여 간추린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다.

 

 

1. 1545. 4. 28 서울 건천동(지금의 삼청동)에서 훈장인 덕수이씨 貞과 삯바늘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변씨의 4남중 3남으로 출생(맏형 희신 둘째형 요신 동생 우신). 字 汝諧 諡號 忠武

   증조부 琚는 講官과 掌令의 벼슬을 하였고 조부 百祿은 음관을 지냈다.

   장군은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군사 놀이를 좋아하고 항상 대장이 되었고 문장과 글씨가 빼어났다. 정직하고 강인한 성격으로 늘 정의감이 넘쳤고 용모가 수려하고 근엄한 선비 같았다. 효성이 극진하였으나 공직에 임용되고는 공무를 우선하였다.

   柳成龍과는 장군보다 세 살이 위였으나 장군께서 아산에서 어머니와 서울로 올라와 공부할 때 먼저 유성룡이 안동 하회에서 가까운 곳인 같은 南村의 묵사동(지금의 묵정동)으로 이사하여 공부했던 글방친구로 둘은 知才로서 다정하여 형 柳雲龍까지 친동생처럼 사랑하게 하였고 벼슬길에 올랐을 때는 장군의 성품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후원자로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합당한 지위에 천거를 하였고 위기에 처하였을 때마다 위로를 하여 주었다.

   元均과도 어린 시절에 알고 지냈으나 개성의 차이로 가깝지는 않았다.

 

 

2. 1552(8세) 외가인 아산 뱀 밭으로 이사, 무예와 병법을 익힘.

* 군사놀이자금마련사건

   1552년 장군께서 8세 때 외가인 아산으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장군은 동네아이들을 모아 놓고 군사놀이를 하는데 기운으로나 지혜로나 당할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대장이었다. 군사놀이를 하려면 칼을 만들고 활도 만들어야 하는데 자금이 없었다.

   장군은 꾀를 내어 동네 다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아 내기로 꼬마들과 합의를 하였는데 마침 의관을 갖춘 점잖은 분이 다리를 건너려고 했다. 장군은 그분 앞을 막으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로부터 통행세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엽전 한 잎만 놓고 가십시오.”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껄껄 웃으면서 “아니 이 다리는 여러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니도록 놓은 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통행세냐? 꼬마들 장난이 너무 지나치구나 ”하면서 그대로 건너려는 것을 장군은 큰 소리로 “옳은 말씀이오나 이 다리는 동네 어르신들이 놓으신 것인데 우리는 이 동네 꼬마들이므로 장차 이 동네의 일을 책임지고 해 나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장래의 주인입니다. 주인이 필요할 때 자기 물건을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일이 무엇이 틀렸나요? 세만 내고 가시면 됩니다.”하여 그 분은 할 수 없이 통행세를 내고 말았다.

 

 

3. 1566(22세) 부친으로부터 무관진출을 허락 받음

 

4. 1572(28세) 무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로 낙방(왼쪽다리가 부러짐)

 

 

5. 1576(32세) 무과시험급제.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 발령(종9품)

 

 

6. 1579(35세) 훈련원봉사(종8품). 8개월 근무

* 병조정랑(정5품) 徐益의 인사청탁거절사건

   1579년 장군이 훈련원봉사(종8품)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병조정랑 서익이 장군의 부하인 친구를 정7품인 “參軍 으로 올리려 한다.”면서 “거기에 맞도록 서류를 꾸며 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때 장군은 얼굴빛이 굳어지면서 “정7품의 자리는 바로 그 밑의 종7품의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 이 나라의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나는 규정대로 일을 처리할 뿐이니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요”하며 거부하자 갖은 위협과 꼬임으로 장군을 설득하였으나 계속하여 거부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 병조판서 金貴榮의 庶女 소실맞이거절사건

  1579년 장군께서 역시 훈련원봉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장군의 사람 됨을 잘 알고 서녀를 첩으로 권하였는데 당시 대다수의 관리들이 京妻와 鄕妻를 두었고 더구나 이 경우는 출세가 보장되는 데도 이를 거절하였다.

충청병사군관발령 7개월 근무.

 

 

7. 1580(36세). 7 흥양발포만호(종4품)

 

* 전라감사(종2품) 孫軾의 전법시험사건

  1580. 7 장군께서 흥양(지금의 고흥) 발포 만호(종4품)로 부임하여 곧 바로 진지를 새롭게 정비하고 수군의 설비와 항로조사, 항해술의 개선, 작전기술의 연구 및 부족 시설의 설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장군을 미워하는 자들의 꾐에 빠진 전라감사 손식은 장군을 혼내려 마음먹고 예하 지방관들을 모이게 하고 능성감영(지금의 화순 능주)까지 오게 하여 여러 가지의 진을 치는 법을 묻고 그려보라고 명령하였는데 장군은 멈춤이 없이 능숙하고 세밀하게 답하자 감사이하 모두가 감탄하고 감사는 잘못을 뉘우치고 장군을 격려하였다.

 

* 전라좌수사(정3품) 成鎛의 오동나무사건

  역시 장군께서 흥양발포만호의 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객사 앞마당의 굵은 오동나무를 베려는 것을 “이 나무는 관의 나무이니 수사인들 어찌 私用으로 베어 갈 것인가” 하면서 베지 못하게 하고 “돌아가서 수사에게 여쭈어라” 하여 수사로부터 미움을 샀다.

 

* 후임 수사 이용의 군사점검사건

  전임수사로부터 장군에 대한 아니꼬움을 인계 받은 전라좌수사 이용이 “죄 줄 것이 없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시에 각 포 (浦)를 점고 하였다. 5포의 군대를 모두 점고 한바 발포에는 결석자가 3명이고 다른 포에는 많은 결석자가 있었으나 발포만이 결석자가 있는 것으로 장군을 파면토록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다른 4 포의 결석한 명부의 초본을 손에 넣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게 된 좌수사는 할 수 없이 걸음이 빠른 자를 시켜 보고서를 되 가져왔다. 그 후(1581) 좌수사는 전라감사와 더불어 여러 수장들의 성적을 의논하면서 장군의 공을 맨 끝에 두었으나 전라도 도사인 조헌이 “도내에서 이순신이 제일인데 그게 무슨 짓이요”하여 무함을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8. 1582(38세). 5 군기경차관 서익(전병조정랑)의 병기검사로 파면됨(1차 파면), 4개월 만에 복직.

 

* 장군이 훈련원봉사로 있을 때 친구의 월천승진을 요구하여 거부당했던 전 병조정랑 서익이 장군에게 부임지의 상관들을 통한 보복을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는데 군기경차관이 되어 1582. 5 발포에 와서 각종검사를 하고 군선과 군기가 잘 되어 있고 훈련도 잘 되어 있음에도 “병기에 먼지가 끼었다” 며 트집 잡는 것을 장군은 전혀 꺼리지 않았으나 “병기의 관리가 엉망이므로 파면해야 됩니다”고 중앙에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9. 1583(39세). 5 훈련원봉사(종8품)로 좌천.

 

* 우의정 柳捵의 전통(箭筒 ;화살을 담는 통)요구사건

  장군께서 서익의 병기검사로 파면되었다가 4개월 만에 복직하여 1583. 5 훈련원봉사로 좌천 복직되었는데 우의정 유전은 장군이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장군에게 “갖고 싶다”고 하였으나

   장군은 “그 것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알면 대감과 소인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전통 한 개로 대감과 소인의 사이를 야릇하게 해석한다면 도리어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여 슬기롭게 거절하여 유전은 “옳은 말이 로고”하며 한층 더 높게 보았다.

여진족을 치러 가는 남병사(종2품), 이용(전 전라좌수사)의 천거로 함경도병영 군사교관이 됨.

 

 

10. 1583. 10 함경도 건원보 권관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북병사 김우서에게 항복을 시켰으나 북병사의 방해로 공적묵살

 

* 북병사(종2품) 金禹瑞의 공적묵살사건

  1583. 10 장군께서 함경도 건원보의 권관(종9품)으로 발령 받았는데 여진족의 鬱只乃가 경계선을 침범하여 조정에서 크게 우려하였으나 장군은 그를 유인하여 없애버렸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크게 포상하려 하였으나 북병사 김우서는 “이순신은 상관에게 보고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하였다”고 하여 상을 주지 못 하게 하였다.

 

11월은 훈련원참군(정7품)으로 승진하였으나 부친의 별세로 1585. 12월까지 아산에서 3년 상을 지냄.

 

 

11. 1586(42세). 1 사복시주부(종6품) 유성룡의 추천으로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만호(종4품)

 

 

12. 1587(43세). 1 함경도감사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둔도둔전관 겸직.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증강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13. 1587. 가을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왼쪽 허벅지에 부상을 입으면서 격퇴하고 포로까지 구했으나 북병사는 장군을 처단코자 하다가 뜻대로 안 되자 모략하여 경흥부사 이경록과 같이 파면함(두 번째)

 

* 북병사 이일의 장군처단미수사건(2차 파면, 첫 번째 백의종군)

  장군께서 1586. 1 함경도 조산보만호 (종4품)로 발령 받고 1587. 1은 녹둔도 둔전 관을 겸하게 되었다. 장군은 녹둔도의 경비에 병력이 너무 적어서 어려움이 많아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증강을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거절만 당하였다.

   녹둔도는 농사를 지어 군량으로 쓰는 곳으로 군사들이 섬을 지키면서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으므로 추수 때마다 식량이 부족한 여진족들의 기습이 우려되었다. 1587년 추수가 끝나갈 무렵 여진족인 沙送阿, 甲靑阿등의 많은 군사가 기습하여 크게 불리하였으나 선방 선전하여 왼쪽허벅지에 부상을 당하면서 격퇴하고 추격하여 포로까지 구했으나 책임을 저야 할 북병사는 장군을 아예 죽여버릴려고 영창에 가두고 형틀을 준비하여 심문을 시작하였는데

   장군께서 전에 병력증강을 요청하면서 그때마다 보고서의 사본을 남겨놓고 당당한 답변을 하자 도리어 불리한 결과가 될 것을 알고 아군의 피해가 크고 장군의 잘 못인 것으로 보고하여 경흥부사 이경록과 같이 파면이 되고 백의종군을 시켰다. 그 후 장군께서는 큰공을 세우고 1588년 후반을 고향에서 쉬었다.

 

 

14. 1589(45세). 2 이광(전라도순찰사부임)의 천거로 군관발령(조방장을 겸임)

 

15. 1589. 11 선전관(서울)을 겸함

 

16. 정읍현감(종6품 태임현감이 궐위하자 이를 겸임)

   정여립의 모반과 관련하여 전라도도사 조대중의 가택 수색 시 장군의 편지가 발견되고 조대중이 친국으로 인한 사망 시에 조정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조문함.

 

*. 정여립의 모반과 관련한 당당한 처신

   1589. 12 정읍현감(종6품)때의 일이다. 정여립의 모반으로 조정에서 을축옥사가 벌어져 전라도도사 曺大中이 사건에 관련되어 가택수색을 당하였는데 장군의 편지가 발견되어 포교 중에 장군과 안면이 있는 자가 있어 장군께 “영감님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없애버림이 어떤가요?” 하자 장군은 “별로 뜻도 없는 글월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국가의 수검에 걸린 이상 없앨 수야 있나”하고 거절하였다.

   그 후 조대중이 친국 당하면서 매맞아죽어 그의 시체가 돌아 왔는데 관리들은 조정이 두려워 문상을 못 하였으나 장군께서 문상을 하면서 그의 가족을 보고 슬피 울어 다른 사람들이 존경에 맞이하였다.

∴1590. 7월 고사리첨사 8월 만포리첨사로 발령하였으나 대간의 항의로 취소됨.

 

 

17. 1591(47세). 2 유성룡의 천거로 진도군수 (종4품미부임), 가리포첨사(종3품 미부임)를 거처 전라좌수사(정3품)가 되시고 나대용의 설계로 거북선을 제작함.

 

 

18. 1592(48세).3. 29 거북선을 여수앞 바다에 띄움

   ″ 4. 12 거북선을 전투장비로 완성하고 성능을 시험함.

   ″ 4. 13 왜장 고니시군대가 부산에 상륙(임진왜란발발)

   ″ 4. 15 원균으로부터 구원요청. 도망자 황옥진의 처단. 5. 1 여수에서 출정.

   ″ 5. 4 병선 85척으로 경상도 당포에 도착.

   ″ 5. 7 옥포에서 적선 50여 척 중 30척 격파, 합포에서 5척 격파.

   ″ 5. 8 적진포에서 11척 격파.

   ″ 5. 29 사천에서 12척 격파(거북선을 처음 사용). 왼쪽 어께에 총상을 입음.

   ″ 6. 2 당포에서 20척을 격파(자헌대부하사)

   ″ 6. 5 당항포에서 26척을 격파.

   ″ 6. 7 율포에서 1척을 격파.

   ″ 7. 8 한산섬에서 73척을 격파.

   ″ 7. 10 안골포에서 40척을 격파 (정헌대부하사)

   ″ 9. 1 화준귀미에서 5척을, 다대포에서 8척을, 절영도에서 2척을 격파하고 부산포에서 500여 척중 100여 척을 격파하였고 아군은 전사 6명 부상 25명 발생함.

 

 

19. 1593(49세). 1. 1 부산에서 적선 470여척 중 100여 척을 격파.

   ″ 2~4 웅천 등의 소탕작전에 성공하고 전라좌수사본영을 한산도로 옮김.

   ″ 8 3도수군통제사(정3품)로 발령.

   ″ 9 장승포해전성공

도원수권율,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병사(종2품)김응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사전 작전회의 실시. 원균은 장군의 명령에 계속하여 불복하면서 모함을 일삼아 정부에서 1595년에는 충청병사(종2품)로 발령하였으나 서인, 북인 등과 같이 계속 모함함. 이때 간첩 요시라가 경상좌병사 김응서 등에게 접근하여 1597. 2. 26 장군의 제거공작에 성공함

 

* 간첩 요시라의 활동(3차 파면, 두 번째 백의종군)

  우리말을 잘 하는 대마도출신 요시라는 1593. 9부터 경상좌병사(종2품) 김응서에게 접근하였으며 강화조약의 진행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적은 장군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언제든지 패할 것이므로 없앨려고 간첩 요시라를 파견하여 원수부와 장군의 알력을 조장하였다.

   1597. 1. 14 소서행장은 가등청정의 군대를 장승포에 은신시키고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어 “소서행장이 가등청정과 사이가 나빠서 가등청정을 죽이려고 하고 일본에 건너간 가등청정이 1. 21 돌아 올 것이니 장군을 보내어 우리가 표시한 배를 없애라‘고 하여 김응서는 이를 믿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꾐에 넘어간 권율은 한산도로 찾아 와서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장군은 도원수가 적의 간계에 빠진 것을 알고 이에 따르는 척만 하였다.

   조정에서는 가등청정이 이미 조선에 돌아 왔음을 알고 크게 놀랐고 이에 경상좌병사 김응서의 장계와 서인, 북인들이 모함하여 장군은 세 번째의 파면이 되고 2.26 서울로 압송되어 3. 4 투옥되었다가 3.12 친국하면서 사형의 어명을 내렸는데 통정대부 정경달의 구명운동, 좌찬성(종2품) 김명원등의 동조, 전라좌수사 이억기, 관충추부사 정탁의 상소로 사형이 면제되고 4. 1 “도원수 권율 밑 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간첩

   요시라에게는 參議<정3품>의 직과 후한 상이 내려짐)

 

 

20. 1594(50세). 9. 29~10.4 의병대장 곽재우, 김덕령과 함께 수륙합동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왜군이 항전치 않아 장문포에서 2척의 격침에 그쳤으며 종전하고 정박하는 장군의 배에 포탄이 날아와 불은 바로 껐는데 “불붙은 함선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가 전사 했어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모함으로 한양에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음.

 

21. 1597(53세). 1. 14 가또오군대가 장승포에 숨어 들음(요시라의 1. 21내침설에 의함)

 

22. 1597. 2. 26 간첩의 공작에 속은 출동명령에 불응하자 경상좌병사 김응서의 장계로 서인, 북인들이 모함하여 파면(세 번 째) 되고 서울로 압송됨. 원균이 3도 수군통제사가 됨.

 

 

23. 1597. 3. 4 투옥됨

   " 3. 12 친국당함. 사형어명.

통정대부 정경달의 구명운동, 좌찬성(종2품) 김명원의 동조, 전라우수사 이억기, 판중추부사 정탁의 상소로 사형이 면제됨.

   " 4. 1 “도원수권율 밑에서 백의종군(두 번째)하라”는 명을 받고 금부도사의 압령으로 4.16 아산에 도착하고 4. 18 모친 (82세)의 시신이 도착하여 간단한 상례를 하고

   " 4. 19 아산을 출발순천원수부에 도착하자 “진주에서 공을 세우라”는 명령이 기다리 고 있어서 진주, 구례를 거치고

   " 6.4 초계 (매실)에 도착 대기타가 7. 18 노량으로 향함.

원균은 운주당에서 기생놀이 등으로 무기가 녹슬고 군량이 탕진되는 등으로 탈영자가 늘어나고 방비의 허술로 야간기습에 거북선마저 불타는 등 휘하 군의 사기가 떨어짐.

   〃 7. 6 왜선 600여 척이 부산에 침입(정유재란발)

    " 7. 7 원균은 출정을 강행하여 七川梁전투등 수차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억기 등 많은 군사를 잃고 한산도로 귀항 중 15~16 고성 춘원포전투에서 대패하여 자신도 도망치다가 잡혀 죽음.

   〃8. 4 3도수군통제사로 발령받고 회령포(장흥)에 가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피난시킨 전선 12척을 접수함.

   〃 8. 28 어란포에서 기습하는 왜선 8척을 격퇴

   〃 9. 7 〃 야습하는 55척을 격퇴.

   〃 9. 16 명량(울돌목)에서 133척 중 31척을 격파(통정대부하사)

   〃10 고향 아산에서 3남 면이 전사함(장남 희, 차남 울은 장군의 휘하에 참전).

 

24. 1598(54세).1 진영을 보화도에서 고금도로 옮김(7월부터 명나라도독 진린과 합동)

     〃 8. 18 도요도미히데요시가 병사함.

 

* 명나라제독 陳麟의 설복

  1598. 1 진영을 보화도에서 고금도로 옮기고 그해 7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한 소서행장의 군을 포위봉쇄 하였을 때의 일이다.

  명군의 행패가 극심하여 주민들이 살기가 힘들었다. 장군은 명제독 진린이 장군이 옆에 있어 든든하고 떨어져 있기를 겁내고 있음을 알고 진린에게 “우리는 진영을 옮길 테니 독단으로 작전을 수행하시오”하여 진린이 “왜 그러시는 거요? 하면서 두려움을 보이자 상황을 설명하고 ”비록 명의 수군이라도 나의 절제를 받도록 하시오“하여 진린이 이에 따르겠다고 하여 주민에게 행패를 하지 않도록 하였고       

  1598. 8. 18 풍신수길이 죽자 적은 앞 다투어 퇴각하기에 바빴는데 소서행장이 연 3이간 진린에게 뇌물을 주면서 “퇴각 길을 열어 달라”고 하여 진린은 장군에게 길을 열어 주자고 거듭 사정을 하였으나 장군이 거절하자 칼을 꺼내 들고 “이 칼은 황제께서 마음대로 쓰라고 내어준 것인데 ”하면서 위협하는 것을

   장군은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소. 그러나 도망치는 적을 살려 보낼 수는 없소”하고 태연스럽게 대하자 “장군의 말씀이 옳소. 내가 잠깐 잘 못 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오”하면서 장군에게 고분고분 하였다.

 

 

25. 1598. 11. 18~19 노량해전에서 500여 척 중 450여 척을 격파 중 왼쪽가슴에 총탄을 맞고 전사(장남 희, 조카 완이 임종함).

 

 

            追贈

 

장례시 우의정

1604(선조37)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 좌의정

1643(인조21) 忠武

1795(정조19) 영의정

 

 

            묘

1599. 2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 밑

1614 〃 〃 어라산기슭

 

 

            사당

남해 이락사(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장군의 영구를 처 음 모셨던 곳)

〃 충렬사(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장군의 영구를 아산 으로 옮기기 전 3개월 안치)

통영 착량묘(통영시 당동 1599설립. 장군사당의 효시)

〃 충무사(통영시 한산면 두먹리 제승당경내)

〃 충렬사(통영시 명정동)

여수 충민사(여수시 덕충동)

아산 현충사(아산시 영치읍 백암리)

 

 

            기념관

통영 제승당(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장군께서 회의를 하셨던 곳 당시 운주당)

〃 세병관(통영시 문화동)

고성 전승기념관(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여수 진남관(여수시 군자동 전라좌수영)

 

   장군의 영정

 

 

¤ 이순신 장군에 대한 유명인들의 평가 ¤

 

명나라 진린도독

명나라 진린 도독은 선조에게 바치는 글에서 “그의 지략은 하늘에서 내렸고 용맹은 자룡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영국해군 발라드장군

영국해군 발라드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공적은 역대 해상 지휘관들 중에서 맨 앞줄에 서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본명장 도고 헤이하치로

2차대전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 3대 명장 가운데 한명인 도고 헤이하치로는 “내 자신은 이순신에 비한다면 하사관만큼도 못 한다”며 1904년 진해만에서 출전할 때 이순신에게 진혼의 예를 올렸다.

 

일본 해군전략가 가와다 이사오

“임란당시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 지원을 했더라면 오늘날 일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보다 이순신의 위대함을 잊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순신(한국인물사)